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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군대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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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갈 무렵 학교 신문사 후배들이 무사귀환(?)을 빌며 적어준 엽서. 위에서 "나만 미워하는 선배님....."라고 적은 후배는 지금은 나랑 한이불을 덮고 자고, 예쁜 "예은"이와  항상 밝은 "동혁"이의 엄마가 되었다. "술", "적시에 졸업 걱정","결강","개김"  후배들이 걱정한 이런 낱말들이 내 대학 생활의 전부를 보여 주고 있다.


 누구에게나 살아오면서 어느 한때의 기억쯤은 되새김질 해 보고 싶지 않은 때가 있다.

 누군가 나에게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몇 년쯤을 들어내고 싶거나, 돌이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1990년 봄에서 1992년 초여름까지의 시간을 들것이다. 친구들은 제대를 하였거나 제대할 무렵인 24살의 늦은 나이에 쫓기듯 간 군대. 지금에 와서 내인생에서 황금 같았던 시간을 돌려 달라거나 보상해 달라고픈 마음도 전혀 없으나(그럴수도 없겠지만) 그때를 그리워한다거나 좋은 기억으로 떠올리고 싶은 마음은 더 더구나 없다.

 군대가서 학교 다닐때의 일로 군 검찰에 끌려 다니고, 새벽에 일어나서 보초 서고, “사람의 발바닥에 물집에 그렇게 많이 잡힐수도 있구나”고 생각할 정도의 행군과 총 보다는 삽을 더 많이 들었던 그런 육체적인 힘듦은 충분히 감내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루 1시간 아니 단 몇 분의 자유로운 사고도 용납 하지 않고, 초코파이 하나, 빵 한봉지, 라면 한그릇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단세포적인 생활, 생각이 없게 만드는 분위기에서 나오는 정신적인 공허함은 감당해 낼 수 없었다.

 입대 초기 요주의 인물로 감시대상이었던 나에게는 군인이라면 그 누구나 볼 수 있는 “국방일보”인가 “전우신문”인가하는 그것 조차도  허락되지 않았으니,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언강생심 꿈도 못꾸던 그때, 활자에 대한 목마름으로 건빵 봉지에 쓰여져 있던 “강력분 몇%, 계란 몇%, 이스탄트 몇%”라는 성분 표시도 글씨라고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1990년 봄 무렵 아카시아 꽃 향기가 온 산야를 덮을 때 “저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올해 말고도 두 번을 더 봐야 집으로 갈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과연 그 시간이 올 까”라고  절망하기도 했지만,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말처럼 그렇게 27개월이 흘러 사단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기위해 의정부역에 두발을 내디딜때의  상큼한 발걸음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전철을 타고 도착한 상록수역에는 학교 다닐때 말썽(?)피우고, 그 말썽 때문에 군대 있을 때에도 항상 노심초사하셨던 아버지께서 마중을 나와 계셨다. 아버지는 그냥 내 어깨를 두드려 주시면서 "고생했다" 고 간단히 말하셨다. 할 말씀은 많으셨겠지만 네마디에 들어 있는 그 의미를 나는 알것 같았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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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른 살이 훌쩍 넘다보면 모든 일에 지치고 흥미를 잃게 되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희망의 밥그릇은 비워진 지 오래고, 혁명을 꿈꾸기에는 벌써 나약해져 있는 나이들인 것이다. 끔찍한 발상이긴 하지만 불혹, 그쯤 되면 두손 들고 깨끗이 항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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